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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불 " 전기"
  •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6-05-03 16:30:53
    조회수
    1062
전기의 이론은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발견한 호박에 의한 마찰력에 기원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 생활의 필요 불가결한 생활수단으로서 이용되는 전기학의 새로운 전개 1819년 이탈리아인 볼타(A· Vol-ta)가 전지를 발명함으로 인해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1831년 페러데이(Fara-dat)가 전자유도를 발견하였고, 1870년을 전후하여 지이멘스(W Von Sie-mens)와 그람(W. T. Gramme)에 의하여 발전기가 완성되고, 이어서 전력 수송기술이 발전되어 이른바 전기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현대문명의 基幹을 이루고 있는 電氣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884년 李朝王宮에 조명용 아크등이 시설되면서 부터이다.
당시에는 희귀한 문명의 이기로만 받아들였을 뿐 規制制度는 두지 않고 다만 이 文明의 利器에 대한 보호정책에만 힘을 썼던 것으로 전한다.

100여년전인 1897년 10월 에디슨의 실험실에서 인류 역사상 첫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모형은 에디슨이 안전한 전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실험했던 수 천가지 재료중의 하나인 필라멘트전구를 본따 만든 것이다.

그 후 미국인 콜브란이 舊韓未政府로부터 電氣事業 경영권을 획득하여 漢城電氣會社를 설립, 운영하다가 1904년에는 韓美電氣會社로 발전, 영업권을 특허권으로 표시하는 한편 모든 영업행위는 美國의 法律의 적용을 받는 등 公法上의 규제는 없고 管理行爲만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기시대의 개막은 19세기 말엽인 1898년 (고종35년·광무2년) 1월18일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 R Bost-wick)가 구한국정부로부터 한성 5서구내 (漢城五著醫內 : 지금의 사대문안)의 전기사업 경영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설립 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01년 8월 17일 처음으로 서울시내에 전등이 점등되자 그야말로 세상천지가 바뀐 느낌이 들었다. 당시의 전등이야말로 가히 신화적인 존재였으며 과학 기술의 위력을 국민들이 인식하는 데에 크나큰 촉매 역할을 한 것이다.

기껏해야 호롱불이나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해야 했고 책을 읽어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등은 암흑의 태양이며, 신비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너도나도 이 신비의 전등을 제집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민들의 극성으로 전등의 수요는 요즈음 연탄 가수요 현상이나 전화 수요보다 더하여 전등 점등 2년 뒤인 1903년에는 마포에 제2발전소가 설립되었지만 전등의 수요는 제대로 충당되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장장 8년 동안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걸친수력조사(水力調査)를 실시하였으며, 이 조사는 화력발전의 보조수단을 고려, 비교적 급류를 많이 형성한 우리나라의 특수한 지세와 수세(水勢)를 감안하여 대규모적인 강유역(江流域) 변경에 의한 발전방식을 채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도 전역의 가능수력은 총 150개 지역에 총발 전력 250만kw라는 풍부한 전력자원을 보유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수력발전 개발계획이 급피치를 올려 마침내 우리나라 영토에도 수력발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며, 수력발전시대의 출현과 함께 중화학공업에 이바지하게 된다.
전력의 수요는 날로 급증을 보이면서 1927년 현대인의 촉각으로써 필요 불가결한 라디오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등장하게 된다.

보잘 것 없는 나무상자 라디오가 선망의 대상이었고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서의 상징이었다. 1935년이 되면서 라디오는 차츰 대중화되어 대령전달을 위한 전파매체로서의 구실을 하기에 이른다.
<1935년 총독부당국이 내건 이른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방송의 전국화(全國化) 계획이 강력히 추진되었기 때문>
이 방송 전국화계획에 따라 1935년엔 함흥, 1939년에는 이리방송국 등 속속 지방방송국이 생기면서 라디오는 서민들 가정의 안방에서 총애받는 재산목록 1호가되어 밤이나 낮이나 시간만 나면 라디오 앞에 모여앉곤 했다.

35년대 이후의 라디오는 그래도 라디오다운 것이었다. 나무상자형을 면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뒤쪽 뚜껑을 열어 보면 상당히 복잡한 전기줄들이 회로를 이었고 은빛 진공관이 서너개쯤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모양도 발전하여 앞쪽은 모가 나지 않게 예각이 다듬어졌고 두 개 방송 이상을 선별해서 들을 수 있는 다이얼판이 흡사 자명종 시계판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전국 방송화계획이 추진된 지 5년후인 1940년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대수는 50만대 내외로 대도시의 경우 30가구에 한 대쯤 보급되어 있었다.
라디오가 있는 집들은 대개 안방 아랫목 벽에 높이 널판지로 작은 선반을 만들고 그위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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